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여인 …


“내게는 두 개의 조국이 있다.

하나는 나를 낳아준 곳이고, 

하나는 나에게 삶의 혼을 넣어주고

내가 묻힐 곳이다.

내 남편이 묻혀 있고 내가 묻혀야 할 조국, 

이 땅을 나는 나의 조국으로 생각한다.”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에서

장애인 복지의 삶을 살다 간 이방자!





방자, 일본 이름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는

1901년 일본 황족으로 태어나

열여섯에 조선 황태자 이은과의

결혼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한일의 민감한 시대에 정략결혼을 하게 된 이방자는

두 나라의 관계나, 왕족간의 관계가 아닌, 

한 남자의 아내로 내조를 하며 살기를 희망하였다.

하지만, 11세에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간

조선 황태자 이은에게는

일본에서 왕족대우를 받으며

살게 된 것이 매우 불편하였다. 


이방자는 이러한 남편 이은에게

조용하고 세심하게 내조를 하였다. 







첫째 아들 진이 8개월 만에 급사하고, 

몇 번의 유산으로 슬픔과 고통에서 10년 만에

둘째 아들 구를 출산하였다.

이후 진주만공격과 일본 패전으로 인해 이은과

이방자는 한국과 일본에게 

모두 버림받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조선 왕족 신분이 상실된 이은과 이방자는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오려 하였으나

국내 정세의 흐름 속에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방자는 일본인임에도

당연히 남편의 나라 한국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았다. 

주위의 걱정을 뒤로 하고, 

1963년 11월 21일 박정희 대통령과의 

회동으로 인해 마침내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11세에 일본으로 끌려가 청년기, 중년기를 보낸

영친왕은 한국에 돌아와서는

병마와 싸우다 7년 만에 서거하였다.



그 당시 왕족계통의 시대가 아니었으므로

영친왕비 (이방자)는 한국에서 일반인으로

봉사활동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예전부터 영친왕과 이방자여사는

한국에 돌아가면 봉사활동과 선행을 하며 살자는

다짐을 줄곧 하였기에 일본에서

꾸준히 활동한 봉사활동은 한국으로 이어져

신체장애인과 소외계층을 위한

교육시설 자행회와 명휘원을 설립하여

사랑과 봉사의 끊임없는 열정을 노년에 불태웠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하여

한국에서는 국민훈장 문화장을 수상하였으며, 

많은 자선모임과 바자회를 통해

후원금을 마련하였으며,

한국으로 귀국 초, 일본인이라는 시선이

영친왕비에게는 커다란 두려움과 불편함이었지만

국내외로 활발한 복지 활동을 하면서

이해와 사랑으로 극복하여,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가 아닌

복지의 어머니로 한국에서 일생을 마쳤다.




고종, 순종, 순정효황후, 덕혜옹주와

역사의 시대를 함께한 영친왕비는

 한일 두 나라의 관계와 고난을 거쳐

남은 생애를 낙선재에 머무르면서,

한국인으로 후회 없는 봉사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사후 장애자 시설 공적으로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하였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여인 …


“내게는 두 개의 조국이 있다.

하나는 나를 낳아준 곳이고, 하나는 나에게 삶의 혼을 넣어주고 내가 묻힐 곳이다.

내 남편이 묻혀 있고 내가 묻혀야 할 조국, 이 땅을 나는 나의 조국으로 생각한다.”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에서 장애인 복지의 삶을 살다 간 이방자!





     

          방자, 일본 이름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는

          1901년 일본 황족으로 태어나 열여섯에 조선 황태자 이은과의 결혼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한일의 민감한 시대에 정략결혼을 하게 된 이방자는 두 나라의 관계나, 

          왕족간의 관계가 아닌, 한 남자의 아내로 내조를 하며 살기를 희망하였다.

          하지만, 11세에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간 조선 황태자 이은에게는

          일본에서 왕족대우를 받으며 살게 된 것이 매우 불편하였다. 


          이방자는 이러한 남편 이은에게 조용하고 세심하게 내조를 하였다. 





첫째 아들 진이 8개월 만에 급사하고, 몇 번의 유산으로 슬픔과 고통에서

10년 만에 둘째 아들 구를 출산하였다.

이후 진주만공격과 일본 패전으로 인해 이은과 이방자는 한국과 일본에게

모두 버림받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조선 왕족 신분이 상실된 이은과 이방자는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오려 하였으나 

국내 정세의 흐름 속에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방자는 일본인임에도 당연히 남편의 나라 한국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았다. 

주위의 걱정을 뒤로 하고, 1963년 11월 21일 박정희 대통령과의 회동으로 인해

마침내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11세에 일본으로 끌려가 청년기, 중년기를 보낸 영친왕은 한국에 돌아와서는 

병마와 싸우다 7년 만에 서거하였다.

그 당시 왕족계통의 시대가 아니었으므로 영친왕비 (이방자)는

한국에서 일반인으로 봉사활동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예전부터 영친왕과 이방자여사는 한국에 돌아가면 봉사활동과 선행을 하며

살자는 다짐을 줄곧 하였기에 일본에서 꾸준히 활동한 봉사활동은

한국으로 이어져 신체장애인과 소외계층을 위한 교육시설 자행회와

명휘원을 설립하여 사랑과 봉사의 끊임없는 열정을 노년에 불태웠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하여 한국에서는 국민훈장 문화장을 수상하였으며, 

많은 자선모임과 바자회를 통해 후원금을 마련하였으며,


한국으로 귀국 초, 일본인이라는 시선이 영친왕비에게는 

커다란 두려움과 불편함이었지만

국내외로 활발한 복지 활동을 하면서 이해와 사랑으로 극복하여,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가 아닌 복지의 어머니로 한국에서 일생을 마쳤다.



고종, 순종, 순정효황후, 덕혜옹주와 역사의 시대를 함께한 영친왕비는 한일 두 나라의 관계와 고난을 거쳐 남은 생애를 낙선재에 머무르면서,

한국인으로 후회 없는 봉사인 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사후 장애자 시설 공적으로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하였다.






일본 황족에서 한국인으로의 일생을

남편 영친왕에 대한 사랑, 

두 조국에 대한 사랑의 힘으로 이겨낸

이방자……


한국근대사의 한 가운데에서 서 있었던

영친왕비를 통해 인간애와 역사, 

현 한일관계의 미래를 희망해 본다.









일본 황족에서 한국인으로의 일생을 남편 영친왕에 대한 사랑, 

두 조국에 대한 사랑의 힘으로 이겨낸 이방자……


한국근대사의 한 가운데에서 서 있었던 영친왕비를 통해 인간애와 역사, 현 한일관계의 미래를 희망해 본다.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단로 188 분도빌딩 208호

Tel 02)735-2573 / Fax 02)735-2572 

E-mail lastqueen-leebangja@naver.com